문장의 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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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튁스 강물에 젖지 않은 한구석

그러한 사람이 하나의 인간이었을까? 인류에 봉사하는 사람이 특정인에 대한 애정을 품을 수 있었을까? 그가 하나의 심장이기에는 이미 지성에 너무 가까이 있었던 것 아닐까?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그 거대한 포옹이, 특정인을 위한 자리를 별도로 마련해 둘 수 있었을까? 씨무르댕이 누구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그 질문에 즉각 대답해 두자. 그렇다.
그가 젊었던 시절, 왕족과 거의 대등한 가문의 가정 교사였던지라, 그 가문의 아들이며 후계자를 가르치게 되었고, 그 어린 제자를 사랑하였다. 누구든 어린아이에게는 쉽사리 애정을 쏟는다. 또한 아이에게 용서하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그 아이가 영주이건 왕자이건 군주이건, 그 모든 것을 용서한다. 천진스러운 나이가 혈통을 잊게 하며, 그 연약함이 신분을 잊게 한다. 하도 어려서 그의 큰 세력도 용서한다. 아이가 상전이라는 사실을 하인이 용서한다. 흑인 노인이 백인 아이를 애지중지한다. 씨무르댕은 자기의 제자에게 열정을 쏟았다. 아이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 아이를 위하여 모든 사랑을 소진할 수도 있다. 씨무르댕의 내면에 있던 애정이 몽땅 그 아이에게로 쏠렸다. 그 가냘프고 천진스러운 존재가, 고독 속에 처박히는 선고를 받은 그 가슴에는 일종의 먹잇감이 되었다. 아이에게로 향한 그의 사랑은 모든 형태의 애정이 혼합된 것으로, 그를 사랑하던 그의 마음은 아버지의, 형제의, 친구의, 창조자의 마음이었다. 아이는 그의 아들이었다. 물론 그의 육신에서 나온 아들이 아니라 정신적 아들어있다. 그가 아비 아니었으며, 아이가 그의 소생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숙련된 장인이었고, 아이는 그의 최고 걸작품이었다. 그 어린 상전을 그가 인간으로 만들어놓았다. 누가 알겠는가? 혹시 위대한 인간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꿈들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 가문 모르게 – 하나의 자성와 의지와 올곧음을 창조하려는 데 가문의 허락이 필요한가? – 그가 자기의 제자인 어린 자작에게 자기의 내면에서 이룩한 모든 발전을 넘겨주었다. 자기의 내면에 있던 미덕의 무시무시한 병균을 그에게 접종하였다. 그의 혈관에 자기의 신념과 양심과 이상을 주입하였다. 그 귀족의 뇌수에 백성의 혼을 부어 주었다.
영혼이 젖을 먹인다. 그럴 때 지성은 유방이다. 자기의 젖을 주는 유모와 자기의 사상을 건네는 스승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다. 유모가 생모보다 더 어머니답듯이, 때로는 가정 교사가 생부보다 더 아버지답다.
그 심오한 정신적 부자 관계가 씨무르댕을 자기의 제자에게 얽매어 놓았다. 그 아이를 바라보기만 하여도 그의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덧붙여 두자. 그가 아이의 아버지를 대신하기는 쉬웠다. 아이에게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고아였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미 타계하였다. 아이를 돌볼 사람은, 앞을 못 보는 할머니와 집을 자주 비우는 종조부 하나 뿐이었다. 얼마 후 할머니가 타계하였다. 그리고 가문의 어른인 종조부는, 군인이며 지체 높은 영주인지라 조정에서 요직을 맡고 있었드며, 그러한 이유로 가문의 낡은 성을 떠나 주로 베르사이유에 머물면서 여러 군부대를 자주 시찰하였고, 어린 고아를 외로운 성에 홀로 남겨 두곤 하였다. 따라서 가정 교사가 모든 의미에서 그 성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이 사실 또한 덧붙여 두자. 씨무르댕은 자기의 제자인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보았다. 아주 어릴 때 고아가 된 아이가 중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씨무르댕은 사경을 헤매던 아이를 밤낮으로 간호하였다. 치료는 의사가 하지만 환자의 목숨을 구하는 사람은 간병인이다. 씨무르댕이 아이의 목숨을 구하였다. 그 아이가 그에게 훈도와 가르침과 학문만을 빚진 것이 아니라, 중병으로부터의 회복과 건강 또한 그의 덕이었다. 그의 제자가 사상만을 빚진 것이 아니라 생명의 빚도 지고 있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빚진 사람을 우리는 애틋하게 아끼고 사랑한다. 씨무르댕이 아이를 그렇게 사랑하였다.
어느 순간 삶이 그들을 자연스럽게 갈라놓았다. 교육이 끝난지라, 씨무르댕은 이제 청년으로 성장한 아이 곁을 떠나야 했다. 그러한 이별들이 얼마나 차갑고 무심한 잔인함 속에서 이루어지는가! 한 아이에게 자기의 사념을 몽땅 남겨 놓은 가정 교사와, 그 아이에게 자기의 내장을 몽땅 남겨 놓은 유모를, 그 가문들은 얼마나 태연히 내보내는가! 보수를 받고 축출된 씨무르댕은, 저 높은 세계에서 나와 저 아래 세계로 돌아갔다. 그 다음, 고귀한 사람들과 미천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 칸막이가 다시 닫혔다. 장교 신분으로 태어나 첫 계급으로 대위를 수여받은 젊은 나리는, 어느 병영으로 떠났다. 그리고 이미 가슴속 밑바닥에서 저항의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던 그 미천한 가정 교사는, 사람들이 흔히 하위 사제 계급이라고 부르는 교회의 침침한 아래층으로 서둘러 다시 내려갔다. 그 이후, 씨무르댕의 시야에서 그의 제자가 사라졌다.

빅또르 위고, 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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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nonymous

    이런 차고 흘러넘치는 서술을 접할 때마다 저는 ‘sprawling 19th century novels~’라는 표현을 떠올리고, 또 여기서 ‘sprawling’은 제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방만한’이라고 번역됩니다.

    방만한: 맺고 끊는 데가 없이 제멋대로 풀어져 있다. (네이버국어사전)

    그러게 편집자는 정말 훌륭한 존재지요. 이 문장도 편집자가 어느곳에서 ‘끊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저런 문장의 (십자?)포화 앞에서 우리가 레미제라블이나 아이반호, 모히칸족의 최후를 아동용 축약본으로 접한다고 해서 또 거기에 만족하고 나중에 커서도 완역본을 안 읽은다고 해서 누가 뭐랄 수 있겠습니까? ㅎㅎ

    93년은 위고가 꽤 말년에 쓴 소설이라, 편집자가 어떤 역할을 했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ㅎ 그리고 차고 결국 흘러넘치는 서술이야말로 위고를 읽는 맛 아니겠습니까!! 간결하고 짜릿한 글도 좋지만 읽고 나면 넉다운될 것 같은 흡족함도 좋지요. 이 전 장에서는 더욱 방만한 어조로 혁명기 빠리의 거리를 묘사하고, 이 뒷 장에서는 로베스삐에르, 당통, 마라가 말싸움해요.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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