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이 너무 많다

도로시 세이어스의 [증인이 너무 많다]를 읽어서 제 마음속으로 [너무 많다 3부작]이라고 불렀던 도로시 세이어스의 증인이 너무 많다, 렉스 스타우트의 요리사가 너무 많다, 랜달 개릿의 마술사가 너무 많다를 다 읽었습니다.
그런데 원제들은 틀리더군요; 증인이 너무 많다는 원제가 Clouds of Witness이지만 요리사와 마술사는 둘 다 Too many ~ 입니다. 마술사가 너무 많다는 요리사가 너무 많다를 패러디한 것이라고도 하지만요. 게다가 요리사와 마술사는 희생자와 용의자들이 요리사/마술사인 상황을 어색하지 않게 진행하려고 요리대회/마술대회라는 설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면 세 책간에 공통점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겠습니다=ㅂ=;; 흙 그래도 혼자 3부작이라고 할래요.
살인이 벌어졌는데 아무런 단서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탐정이 단서를 하나씩 캐내는 것을 보는 것도 재밌지만 상반된 증언을 하는 단서와 증인이 여기 저기 널려있고 하나를 제외하면 또 하나가 나오고 그런 상황에서 사실과 맞지 않는 단서들을 제외하는 것도 재밌죠. 나중에는 이 모든 일이 하룻밤에 일어났다니,, 하기도 했지만요. 개인적으로는 추리 과정보다 후반부에 피의자인 공작을 위해 법정이 따로 소집되는 장면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명제가 그냥 추상적인 언명이 아니라 어떤 역사적인 실체 위에서 성립되었다는 것이 새삼스레 느껴졌거든요.

“그래봤자 소용없어요, 머블스” 임피 경이 말했다. “시간이 흐르고 갖가지 사건을 겪다 보면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젊은 여자도 나긋나긋해지기 마련이죠. 하지만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노부인은 이 지상의 힘으로는 말릴 수가 없는 법입니다.”
– 증인이 너무 많다 번역본
진보적인 젊은 여성들이 세파에 길들여질 수 있을지 모르나, 나이든 진보적 여성들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은 이 지구상에 없다.
– 세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다면 번역본

소설을 읽다가 이 문장을 읽고서야, 예전에 [세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다면]을 읽을 때 세이어스의 소설을 읽고 싶어했다는 사실이 기억났습니다-_-;; 함께 싸울 수 있는, 자기에게 걸맞는 남자로 만들어 냈다는 피터 윔지경과 자신과 많은 공통점을 지닌 상징적인 여성 캐릭터인 해리엇 베인. 그리고 저 구절이 어떻게 나오는지 하는 것도 궁금했거든요.
이 문장에서 얘기하는 나이든 진보적인 여성인 피터 윔지 경의 어머니의 진보성은 이성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세상을 보는 통찰력에서 나오는 기질적인 것입니다만, 체면이나 편견, 진부함에서도 자유로운 모습은 멋졌어요. 아들은 살인혐의로 재판중인데 문자 그대로 신분이 한참 떨어지는 아들의 애인을 대하는 태도도 참 대범하고요.

This Post Has 2 Comments

  1. 캐스트너

    와 이게 다른 블로그와도 글을 엮을 수 있군요! 오오~
    저도 공작을 위한 법정 장면을 보면서 아 역시 공화제가 좋구나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살인을 저지른 영국 로드들을 위해 따로 의회법정을 열지 않고 일반 법정에서 다루는 식으로 영국 법체계가 바뀌었을까 모르겠습니다.
    (로드 저스티스가 없어졌다고 하니 바뀐 것 같기도…)

    그 후반부에는 영국의 고루한 귀족제와 계급 시스템에 대한 풍자가 없지 않은데 강도가 너무 약한 거 같다고 느꼈어요. 풍자가 스며들기엔 로드 피터나 세이어스나 너무 점잖은 듯합니다. 그게 가끔 아쉽지요.

    네, 다른 블로그랑 엮을 수 있어요. 좋죠^^
    다른 블로그에 링크할만한 포스트는 없어서 별로 안 쓰기는 합니다만;;

    법정 장면 꽤 인상적이었어요. 세이어스가 꽤 분량을 들여서 야단스럽게 묘사한 것이 그런 효과를 노린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 전적으로 시스템에 대한 풍자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점잖긴 하지만 뭐 그게 또 매력이니까요ㅎㅎ

  2. 캐스트너

    원제가 성경에서 나온 건 아시죠?
    구름같이 많은 우리 믿음의 증인들이란 구절에서 나왔습니다. (역서에 설명이 있던가요?)

    전 요리장은 읽었는데 마술사는 안 읽었네요. 아마 역서 제목은 일부러 추리독자들에게 익숙한 느낌을 주게 뽑았겠죠.

    아뇨 몰랐어요+_+
    책도 반납한지 오래되어 설명에 그 얘기가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요^^;; 증인의 구름떼(…)보다는 증인이 너무 많다 쪽이 친근하고 좋긴 해요.

    요리장을 읽을 때는 도대체 울프에게 홈즈의 아들같은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는지에만 신경을 쓰며 읽느라고 다른 건 별로 기억이 안 나요. 마술사도 나름 귀족탐정 다아시경 이야기입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고 마술이 기술을 대체하는 세상의 영불제국이 배경인 소설인데, 미국작가가 쓰는 영국귀족의 이미지란 이런 거구나 싶어요. 음… 그러게요. 솔직히 다아시경보다는 윔지경이 좀 더 귀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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