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4 남의 야구

9시가 다 된 시간, 남의 야구는 이제 승부가 거의 가려졌겠거니 하고 관심없는 척 텔레비전을 틀었습니다. 얼레 6회인데 6:5. 아니 오늘마저 한점차 승부를 하는 것이냐! 했는데 삼성 공격, 주자 1루 상황에서 2루타가 하나 나오니 주자는 냅다 달려서 홈인, 동점. 헉 설마 오늘도 무재배를ㄷㄷㄷ 하며 저는 텔레비전 앞에 붙잡혔습니다. 양팀 모두 점수를 6점씩 냈으니 타격감이 나쁘지는 않을 터인데 작년까지 넥센에서 한솥밥 먹던 장원삼과 이현승이 나오더니 갑자기 미칠 듯한 투수전이 시작되더군요. 장원삼이 6이닝 1피안타 1사사구 무실점으로 뜬금없이 퀄리티 스타트ㅋ를 찍고 이에 질세라 이현승도 3 2/3이닝동안 삼진을 일곱 개나 뽑아내면서 무실점 역투. …그리고 불펜에서는 오늘도 임태훈이 몸을 풀고 있었습니다. 두산이 마무리투수도 없이 포스트시즌 열 경기를 달려오면서 불펜 피로는 이루 말 할 수가 없지만, 그 중에서도 임태훈은 정말 짠해요. 딱 아기곰처럼 생긴 어린 투수가 몇년 동안 불펜에서 믿을맨 노릇을 하고 올림픽 참가할 시점에 하필 부진해서 중간에 하차, 동료들이 금메달 따는 걸 구경했어야 했고 WBC에서는 인상적인 모습은 보여주지는 못했죠. 그리고 올 시즌 드디어 선발진에 합류했는데 팀에서 이닝은 세번째로 먹어가며 애를 썼지만 불펜에서 선발로 합류한 선수가 첫 시즌부터 잘 할 수는 없겠죠. 작년 영명이와 마찬가지로 올 시즌 최다 피홈런 타이틀을 가져갔습니다. 게다가 시즌 막판에는 다시 불펜으로 구르고, 몇년간의 고생으로 몸도 여기저기 아파서 팬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공익 다녀오는 것이 낫겠다는 얘기까지 있더라구요. 그러던 와중에 준플옵에 나와서는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고 결국 밀어내기로 실점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임태훈이 말이죠. 그러던 선수가 지금 몸을 풀고 있고 투구수가 60개에 육박하자 점점 공이 가벼워지는 이현승 선수를 구원해서 등판했습니다. 사실 플옵 첫 등판에서는 밀어내기라는 아찔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 후로는 잘 던지고 있었어요. 짠하게도 말이죠. 근데 아직 듬직한 장원삼에 비해 임태훈은 힘들게 피칭하는 것이 눈에 보였어요. 게다가 9회에도 승부는 결정나지 못하고 연장 돌입한 상태. 10회에는 양팀 다 무득점. 그리고 11회 말 삼성 공격. 첫타자 김상수는 네 번째 공을 잘 받아쳐서 좌익수 앞 안타로 1루에 출루했습니다. 다음 타자는 희생 번트, 1사 2루. 세번째 타자를 상대하고 있던 중 짧게 흐른 폭투로 긴장하고 있던 2루 주자는 3루 도루 성공. 1사 3루, 투투피치에서 파울 하나 헛스윙 하나를 유도해 2사 3루를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한 타자를 더 잡으면 다시 공수는 교대되는데, 상대는 끝판대장같은 포스를 풍기는 박한이.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는 볼을 두 개 던져봤지만 박한이가 걸러내자 배터리는 아예 거르는 방법을 택합니다. 2사 1,3루에서 박한이의 도루로 2사 2,3루. 다음 타자도 풀카운트 승부끝에 채우기 작전으로 내보내긴 했는데, 아무래도 네번째 공인가는 많이 아쉬웠어요. 임태훈도 거의 주저앉을 뻔 하다가 다시 일어나더군요. 다음 타자를 반드시 잡아내야 하는데… 컨디션 안 좋던 박석민도 집중력을 갖고 공을 커트해 내더군요. 그리고 운명의 일곱 번째 공. 약간 빗맞아 유격수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던 공은 달려오던 유격수의 글러브로 들어갈 듯 하다가 뒤로 흘러버렸습니다. 환호하며 달려나오는 삼성 선수들 사이에서 임태훈은 주저앉고, 이것이 야구겠죠.

아 놔 왜 남의 야구를 이렇게 자세히 복기하고 난리-_-
암튼 태훈아… 넌 정말 큰 투수가 될 거야ㅠㅠ 오늘 정말 멋졌다ㅠㅠ

임태훈 선수
패자와…

박석민 선수
박석민 선수
…승자. 쿨럭;;
제가 박석민 선수를 특별히 우습게 보거나 하는 건 맞지만ㅋㅋㅋ 아 증말 사진이 왜 다 이 모냥ㅋㅋ

그리고 특별히 장원삼과 이현승.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77&aid=0002468970
“오늘 전광판에 이름이 나란히 오른 걸 보고 느낌이 이상했다. 하지만 지고 싶진 않았다”

저는 승부욕 수치가 거의 바닥이라=ㅂ= 사실 팀이 꼴찌를 해도 아숩기는 해도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더라구요.
응원팀 꼴찌했다고 화내거나 중요한 경기 말아먹어서 화내는 분들 보면 쫌 신기하고;;
살면서 승부가 걸린 상황도 거의 없었던 것 같고;;

장원삼이랑 이현승이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번갈아 나와 던지는데
참 맴이 그렇더라구요.
근데 저는 그냥 맴이 그렇고나, 하고 있을 때 마운드의 투수는 그러니까 더 잘 던져야겠다, 하나봐요.
인터뷰는 없었지만 이현승 선수도 마찬가지 마음이었겠지요.
이렇게 야구에서 배우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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