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검색질을 하다보면 (재밌긴 하지만) 어떻게 일본 고등학교에 그렇게 키크고 농구를 NBA급으로 잘 하는 애들이 우글거릴 수 있느냐며 현실성이 없다고 버럭거리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아이 참 만화인데 재밌게 보면 되는 거지 그렇게 까칠하게 굴 것 까지야, 하면서 너그러운 척을 하는데 사실 나의 까칠함도 만만하지 않다. 텔레비전 드라마 볼 때면 하두 까칠하게 굴면서 궁시렁거려서 텔레비전 앞에서 쫓겨난지 어언… *년.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남자등장인물이 여자등장인물에게 꼬박꼬박 반말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반대의 경우는 존대말. 심지어 여자 고용주인 경우에도 옛날에 애인이었다는 이유로 반말. -_- ) 단편을 여섯 개쯤 읽다가 집어치웠다. 책은 맘에 들어서 언젠가 읽기는 하겠지만. 근데 책이 어디로 가출했나; 셜록 홈즈는 요즘 가능하면 안 읽고 싶다. 어렸을 때 그렇게 좋아하던 캐릭터인데, 인종차별적이고 제국주의적이고 공정함같은 거야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거야 19세기말 영국 사람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골상학 얘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읽고 있는 내가 민망해지고 ‘아들이 벌레를 못살게 구는 잔인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버지에게서 유전된 것’이라는 대사를 읽으면 쥐구멍을 찾고 싶은 것이, 이건 뭔가 한참 망가진 첫사랑의 남자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최근에 읽고 있는 책에서는 책의 첫머리에 나온 ’39미터에 이르는 유리판’ 때문에 빈정이 상해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렇게 별 사소한 것에 까칠하게 굴다가도 어딘가로 가면 그 기준이 없어져 버린다. 예를 들어 반지전쟁의 인종차별적인 맥락같은 것. 이 주제는 톨키니스트들 사이에서 해묵은 논쟁거리이기도 하더라만은, 그게 그렇게 단순하게 볼 것이 아니지, 하고는 매우 너그럽게 넘어가버렸다(;;;) 뭐 센루에 이르면 할 말도 없다(…) 지향이 취향을 넘어서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ㅂ=
39미터에 이르는 유리판에서 39미터라는 숫자때문에 빈정이 상하신 것인가 혼자 궁금해하고 있어요-ㅂ-;;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라는 책이 그런 것이었군요..() 전 남자가 반말 존대말 섞어서 하는게 되게 좋더라구요… 상관없는 얘기지만;;; 암튼 오늘도 수업시간에 이러고 있는 수업시간만 되면 까칠해지는 저입니다 크크
원래 그런거지요. 저는 홈즈에 대해서도 까칠함이 적용되지 않고있어요. 여전히 그는 저에게 잘생기고 멋지고 똑똑한 독신남의 이미지가….반지의 제왕에 그런 뉘앙스의 이야기가 있었나요? 난 기억도 나지않고(..) 얼음불에서도 인종차별논란이 일던데 난 사람들이 그런걸 어떻게 찾아내는지가 더 신기하구요;;;
까칠함의 기준은 그저 애정이죠()
저는 원래도 별로 안 까칠한 성격이지만(..) 픽션을 접할때는 더군다나 까칠함이 바닥으로 떨어져서;; 정말 도저히 용서안되는, 예를 들어 자기 여자친구가 처녀가 아니었다고 충격받는 찌질이 남자놈이 등장한다거나 하는 것만 아니면 그냥 대충 다 넘어가지 싶네요.
저도 소녀시절 홈즈님을 흠모했던 기억이/// 루팡과의 대결에서 홈즈님이 패배하면 막 분노하고 그랬었죠. 그러고 보니 뭔가 센도와의 대결에서 루카와가 패배했을 때의 심정과 비슷…
…. 이 글 보면서 생각해보니, 저는 당췌 기준이란 없는 것 같구요orz 그냥 그 날 그 날의 기분에 따라 까칠함의 정도가 부호를 달리한다는 정도….?;; (뭐냐 그게;;) 아하핫. 저도 슬램덩크 볼 때 그런 생각 많이 했었다죠a;; 청소년 농구 시합을 보거나, (슬램덩크에 비하면) 땅에 붙어다니는 주변 남학생들을 보거나 할 때 특히;;
셜록 홈즈… 음…. 윗분들의 이야기를 빌자면, 홈즈가 패배했을 때 저는 이미 홈즈를 버렸다는 망언이… (먼산)
와 이 글은 2007년에 쓴 글이군요. 우하하 지금 다시 읽어 보면 감회가 새롭겠어요.
홈즈가 너도밤나무집에서 아들의 잔인한 성정이 아버지한테서 유전된 것이라고 딱 잘라 말하지는 않았다고 꼬집으면 저는 ‘까칠한’ 독자가 아니라 ‘깐깐한’ 독자? ㅎㅎ
저는 어떤 쪽이냐 하면 지금의 독자가 옛날 소설을 읽으면서 20세기 후반 이후에 나타난 정치적 공정함 기준을 들이대는 것을 싫어하는 편입니다. 물론 현재적 관점에서 옛날의 작품을 비판할 수도 있고 또 그런 비판이 필요한 경우도 있기는 한데 대부분의 경우는 제대로 된 비판이 아니라 1.역사적 지식의 부족에 기인한 오해이거나 2. 역사적 의식의 결여에 기인한 피상적 비판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요. 지금은 아이패드로 쓰는 거라 길게 못 쓰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이야기해보고 싶네요;;
어제 이야기에 덧붙여서…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옛날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필요한 것은 1. 자신이 지금 완전히 다른 세계에 관해 읽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고 2. 그는 자기 기준을 들이대며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것을 의식해야 된다는 거죠.
1과 관련하여, 여기저기 아무 맥락에나 마구 인용되어서 이제는 인용하기가 미안할 지경이지만 다시 한번 L. P. 하틀리의 첫대목을 인용하자면 ‘과거는 낯선 나라고 거기서 사람들은 다르게 행동’합니다. 중세는 말할 것도 없고 비교적 가까운 과거라 할 수 있는 1890년대 영국도, 1910년대 영국도 다 15세기 조선 전기만큼 낯선 나라입니다. 우리와 시간적으로 가까운 시대라고 그만큼 심리적 거리도 가까울 거라는 생각은 아무 근거가 없습니다. 모든 시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지금과 다 다릅니다. 가까운 과거는 더 많은 사료와 흔적이 남아 있어 노력하면 우리가 이해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일 뿐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니죠. 홈즈와 왓슨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전 이 점을 언제나 의식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옛날 소설을 읽다가 당연히 ‘뭐야, 이 인물 행동 너무 이상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의 독자가 과거의 인물과 간극이 느껴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죠. 그런데 왜 다음 반응이 자기 시대 기준으로 비판하는 것으로 점프해야 합니까? 그럴 때는 그 인물이 사는 시대상에 대해 고민하는 단계로 넘어가야죠.
물론 은희 씨 말대로 그런 비판, 인상 비평이라도 해야 다음 단계(이해의 단계? 애정의 단계?)로 발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가 보기에 이해는 제대로 된 비판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만 비판만 한다고 저절로 이해가 깊어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제도 말했지만 이해의 첫걸음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이니까요.
P.S. 이것은 또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그렇다고 어떤 작품을 좋아하는 데 꼭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잘 이해가 안 가지만 그냥 좋아하는 경우도 수두룩하죠. 물론 좋아하면 이해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게 되어 결국에는 이해의 가능성이 커지지만요. 아무튼 이 두서없는 추신의 결론은 좋아하는 것과 이해는 또 별개의 범주라는 거 – 음, 이건 너무 당연한 소리인가요?
새 독자들은 끊임없이 나타나서 읽어대고 뭐야 이상해 단계를 거치며 투덜대는 사람도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에 자기 시대 기준으로 비판하는 사람도 계속 있을 거에요. 이 블로그의 다른 글에서 한 얘기지만 뭐야 홈즈 이상해 단계를 거쳤기 때문에 홈즈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진 저로서는 이 단계에서 투덜거리는 일이 꼭 불필요하다고 볼 수는 없어요. 그리고 파일씨 얘기와 약간 방향이 다르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도 좋아하게 되어 이해하려고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경우와 아닌 경우는 어떤 차이인지, 저는 소설을 읽을 때 이게 가장 궁금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