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모프의 과학소설 창작백과

옹호.
“로봇은 충실하고 다정다감하고 친절하지 않을 수가 없다오. 그렇게 만들어진 기계이니까.”
– 그렇게 만들어졌기에 그런 것보다 그렇게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이 더 가치있는 이유는 그렇게 행동하는 주체의 시간과 노력이 있기 때문인걸까. 그럼 로봇을 그렇게 만든 주체의 시간과 노력은 어떨까. 그 충실함과 다정다감함을 받는 객체의 입장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건, 사회에서건 황금기를 과거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우선 적어도 개인의 생에서 과거는 어떤 의미가 있다. 노년기 사람들에게 또는 나와 같이 장년기의 사람도 더 젊고, 힘세고, 날씬하고, 더 활기차고, 팽팽한 피부에, 일은 더 많이 하고도 지치지 않았던 시절의 추억이 분명 존재한다. 그게 황금기가 아니라면 뭐겠는가?
(…)그러나 기억에는 오류가 있기 마련이라 과거 속에 달콤한 아지랑이를 흩뿌려놓고 불만스러운 일은 지워버리고 즐거웠던 일은 확대시킨다.

한 가지 이유는 더 편하기 때문이다. 각 소설마다 사회적 배경을 새로 창조해내야 하는 대신에 전의 것을 이용할 수 있다. 작가는 기존의 배경과 때로는 기존의 인물을 가지고 새로운 소설을 시작할 수 있다. 작가가 아닌 사람은 이 작업이 얼마나 많은 정신적 고통과 심리적 피로를 덜 수 이는지 짐작 못 할 것이다.
아 귀여운 노인네=ㅂ=

과거의 황금시대나 미래의 메시아 시대를 두고 그린 형태로, 신화 문학이나 종교 문학에서 이상 사회를 논하기도 했다. 에덴동산은 전자의 가장 유명한 예이고 이사야서 11장은 후자의 예라 하겠다.
하지만 순수한 디스토피아 소설도 순수한 유토피아 소설만큼이나 지겹고 참아내기 어렵다. 가장 유명한 현대의 순수 디스토피아 소설, 1948년에 발표된 조지 오웰의 1984를 생각해보자. 나는 이 책을 아주 질 낮은 책으로 여긴다. 오로지 미국 내 냉전 기류를 탔기 때문에 큰 히트를 쳤다고 생각한다.
순수 유토피아 소설은 ‘놀라워, 놀라워, 놀라워’ 하는 단 한 개의 음밖에 내지 못한다. 순수 디스토피아 소설도 ‘끔찍해, 끔찍해, 끔찍해’하는 단음밖에 내지 못한다. 그리고 한 개의 음으로는 멜로디를 만들 수 없다.
동일시한 대상이 되는 편은 용기, 지능, 품위를 갖추고 투쟁해나가거나, 또는 적어도 이것을 습득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동일시한 대상이 수치스럽다면 이야기의 효력이 없을 것이다.
이거야말로 놀라운 평가였지만, 공산주의 혹은 무정부주의에 대한 아시모프의 거리낌이나 이후 얘기하는 아시모프의 소설론에 비추어보면 그 입장에서는 그런 평가가 나올 수도, 하고 수긍할 수도 있다. 여전히 아쉽지만.

과학소설이 예언적이어야 한다거나, 앞으로 일어날 일을 그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상상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그려야 할 필요도 없다.
변화의 존재, 변화의 수용이면 충분하다.

전적으로 사회적인 진화 때문만은 아니라는 게 내 의견이다. 대담무쌍한 신인 작가 때문도 아니었다. 조안나 러스와 어슐러 르 귄같은 출중한 여성 과학소설 작가들 때문도 아니었다.
여성이 과학소설 독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단편 [전설의 밤]의 상징적 의미를 분석한 이에게 도대체 말도 안 된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오만하게 말하기를 “당신이 썼다고 해서 작품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내가 톨킨의 반지가 현대 과학 기술을 상징한다는 주장을 에세이로 썼을 때, 한 독자가 톨킨 자신은 그 입장을 부정했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래서 나는 “그건 상관없어요. 그래도 반지는 현대 과학 기술을 상징합니다”라는 답장을 보내줬다.
작가가 스스로 인식하는 것보다 또는 이해하는 것보다 더 깊은 상징적 의미를 작품에 삽입한다는 사실은 가끔씩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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