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맞춤법을 지켜야 하는가?

http://djuna.cine21.com/bbs/view.php?id=main&no=182750
한글은 한국어의 형태소를 정확히 분석하여 담아내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형태소를 드러내는 힘이 탁월합니다. ‘글’은 어디까지나 말을 적는 수단입니다. ‘말’이 먼저이지 ‘글’이 먼저는 아닙니다. 글 없는 민족은 있어도 말 없는 민족은 없습니다. 말이 우선입니다. 말을 얼마나 정확하게 적을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글이 얼마나 뛰어난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확하다’는 것은 소리 나는 대로 적는다는 뜻일까요? 가령 옛날에는 한글을 소리 나는 대로 적었습니다. 지금은 ‘샘이 깊은 물은’이라고 적지만 옛날에는 ‘새미 기픈 므른’이라고 적었습니다. 앞의 것을 ‘끊어 적기’라고 하고 뒤의 것을 ‘이어 적기’라고 합니다. 끊어 적기는 한국어의 형태소를 올곧게 담아내는 데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끊어 적기를 한 덕분에 한국어는 ‘샘’이라는 형태소, ‘깊’이라는 형태소를 얻었습니다.

지금은 ‘끊임없이’라고 적지만 옛날 책을 보면 ‘끈힘업시’라고 적었고 ‘높이’를 ‘노피’로 적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끊임없이’라고 읽거나 ‘끈힘업시’라고 읽거나, ‘높이’라고 읽거나 ‘노피’라고 읽거나 듣는 사람은 어려움 없이 알아들을 것입니다. 하지만 글로 읽었을 때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끈힘업시’를 ‘끊임없이’로 적은 것은 국어학자들이 한국어의 형태소를 명확히 분석해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다양한 받침을 적을 수 있는 한글의 장점 덕분이기도 합니다. ‘자른다’라는 뜻을 가진 형태소 ‘끊’을 파악하여 글자에 담아낸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 한국인은 ‘끊’이라는 형태소와 ‘끈’이라는 형태소를 구분합니다. 마찬가지로 ‘없’이라는 형태소와 ‘업’이라는 형태소도 구분합니다. 맞춤법을 지킨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형태소를 지킨다는 뜻도 됩니다. 맞춤법이 흐트러지면 형태소도 무너집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없는 이’와 ‘업는 이’를 구분하기 어렵게 되며 ‘끊기’와 ‘끈기’의 변별력도 잃게 됩니다. 그래서 “기자 끊기가 보통이 아니다.”라는 문장과 “기자 끈기가 보통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을 말로 하면 “기자 끈키가 보통이 아니다.”와 “기자 끈기가 보통이 아니다.”로 구별이 되는데 막상 글로 적으면 구별 못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옛날에는 ‘높이’라고 적지 않고 ‘노피’라고도 많이 적었습니다. 그런데 국어학자들이 ‘낮다’의 ‘낮’에 반대되는 뜻을 지닌 형태소는 ‘노’가 아니라 ‘높’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표준어를 ‘높이’로 정했습니다. 그렇게 많이 쓰다 보니까 이제는 ‘높’이라는 글자만 보고도 이것이 ‘낮다’의 반대말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립니다. ‘높푸른’ 하늘 하면 ‘높고 푸른’ 하늘이라고 알아듣지요. 그런데 만약 소리 나는 대로 쓴다고 이것을 다시 ‘노피’라고 적는 사람이 많아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높’이라는 형태소는 ‘낮다’의 반대라는 독보적 뜻을 더는 지닐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노푸른’ 하늘이라고 하면 이게 ‘노랗고 푸른’ 하늘을 뜻하는지 ‘높고 푸른’ 하늘을 뜻하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색채만을 뜻할 때는 ‘노[黃]푸른’으로, 고도까지 뜻할 때는 ‘노[高]푸른’으로 각각 한자를 덧붙여야 하는 웃지 못할 처지에 몰릴지도 모릅니다. 물론 과장된 예입니다. 하지만 맞춤법이 무너지면 다양한 형태소를 나타낼 수 있는 한국어의 무한한 잠재력이 망가지고 결국 한자에 다시 기대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희재,『번역의 탄생』

저도 맞춤법 무지 많이 틀리고 언젠가 이 블로그에서는 통신체 금지를 금지한다고 쓰기도 했고 심심하면 디씨가서 놀긴 하지만, 역시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하이텔 슬램동에서 ‘천재, 대핀치’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작가분이 일본어의 매력이 개념없이 마구 사용되는 외국어에 있는 것 같아 이런 제목을 지었다고 하신 기억이 납니다. 근데 지금은 뭐 외계어가 문제가 아니고-_-a 어느 외국 사람이 한국에는 한국 단어가 별로 없냐고, 길거리를 걸어가는데 간판을 읽는 데에 별 불편이 없더라는 얘기를 했다던데 정말 한글만으로 쓰인 간판도 광고도 찾기 어렵더군요. 울 어무니 알파벳 가르쳐 드리지 않았으면 한국땅에 사시면서 간판도 못 읽고 다니실 판이에요.

Leave a Reply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