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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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빈은 현금의 집을 알고 있었다. 이층집이었다. 여름이면 이층 베란다를 받치고 있는 기둥을 타고 능소화가 극성맞게 기어올라가 난간을 온톤 노을 빛깔의 꽃으로 뒤덮었다. 그 꽃은 지나치게 대담하고, 눈부시게 요염하여 쨍쨍한 여름날에 그 집 앞을 지날 때는 괜히 슬퍼지려고 했다. 처음 느껴본 어렴풋한 허무의 예감이었다.
…그 무렵 그는 곧잘 능소화를 타고 이층집 베란다로 기어오르는 꿈을 꾸었다. 꿈속의 창문은 검고 깊은 심연이었다. 꿈속에서도 그는 심연에 도달하지 못했다. 흐드러진 능소화가 무수한 분홍빛 혀가 되어 그의 몸 도처에 사정없이 끈끈한 도장을 찍으면 그는 그만 전신이 뿌리째 흔들리는 야릇한 쾌감으로 줄기를 놓치고 밑으로 추락하면서 깨어났다.
– 박완서, 아주 오래된 농담

This Post Has One Comment

  1. 캐스트너

    아 이것이 능소화군요. 자전거 타면서 종종 보았는데.

    네, 이꽃이에요. 여름내 흐드러지게 피죠. 근데 이름을 잘 잊어버려서 기억차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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