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이야기/테드 창

정말 멋진 소설집이에요. 얼마 전에 블로그에 읽고 나면 흡족해지는 소설을 읽고 싶다고 칭얼댄 적이 있는데 읽고 나서 맛있는 정찬이라도 든 것 같은 흡족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8편의 중,단편이 실린 소설집인데 구성도 굉장히 훌륭했답니다. 소설집을 여는 바빌론의 탑, 클라이맥스 부분에는 지옥은 신의 부재가 자리잡고 있고, 그 바로 뒤를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 다큐멘터리가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어요. 소설집의 가운데는 표제작이기도 한 네 인생의 이야기가 있고요. 그 사이사이의 다른 단편들도 정말 멋졌습니다.
한편 한편 읽을 때마다 책장을 덮고 방금 읽은 것을 곱씹고 싶은 생각과 빨리 다음 편으로 넘어가고 싶은 생각이 계속 부딪혔어요.

역시 스포일러 많습니다;;;

01. <바빌론의 탑_Tower of Babylon> 1990.
SF라고 들었는데 책 제목이 당신 인생의 이야기. 첫 작품 이름은 바빌론의 탑. 배경은 하늘에 닿는 탑을 쌓고 있는 그때 그 시절의 바빌론. 언제 외계인이라도 나타나나부다, 이 사람들은 하늘에 닿는 탑을 쌓는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일인지 깨닫게 되는 걸까… 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이 사람들은 정말 ‘하늘에 닿는 탑’을 쌓고 있었어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 저에게 정말 반전은 소설의 중간에 있었습니다.

02. <이해_Understand> 1991.
백과사전에 한 줄의 설명, 세계불가사의대백과사전에 수백개의 사례로 나타나 있는 ‘초능력’이란 것이 사실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소설의 캐릭터들도 어쩐지 정이 가지요. 찬찬한 성격의 바빌론의 탑을 올라가던 석공도, 자신의 인식의 능력이 조절의 능력이 뻗어가는 것을 음미하고 진정으로 기꺼워하던 이 이해의 주인공도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03. <영으로 나누면_Division by Zero> 1991.

무지 수학적인 SF였습니다. 헤헤

04. <네 인생의 이야기_Story of Your Life> 1998.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뉘어 있던 두 개의 이야기가 맞물려들어가면서 가슴이 점점 죄어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이미 죽어버린 딸이 언어를 배워가는 사랑스러운 지난 날을 하나씩 꺼내어 이야기하는 어머니와 외계인에게 새로운 언어를 배워가는 가슴벅찬 도정을 걷는 한 언어학자의 이야기가. 한 이야기는 과거로, 한 이야기는 미래로 전개되면서 두 이야기는 어느 시점에서 하나로 꼭 맞물립니다. 이야기하는 사람의 가장 사랑스러운 순간으로요.
그리고 이 이야기는 순차적이지 않은 사고체계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최단거리를 선택하는 광자처럼, 전체로써만 온전한 뜻을 전하며 어디에서도 시작할 수 있는 언어, 시작할 때 이미 완결된 이야기. 순차성에 찌들은 호모 사피엔스인 저로서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어요.

05. <일흔두 글자_Seventy-Two Letters> 2000.
이 소설집의 재밌는 것이 굉장히 다양한 형식의 소설들이 모여있다는 것인데, 이 소설은 스릴러 형식이었습니다.(주인공은 죽지 않아요)
인간복제에 관한 이야기인데 물론 배경은 현실은 아닙니다. 마치… 산업혁명시기에 다른 쪽으로 뻗어간 것 같은 세계였어요.

06. <인류과학의 진화_The Evolution of Human Science> 2000.
SF답게 누군가 인류에게 가르쳐주는 ‘과학기술’.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라고 하나요, 이런 딜레마. 여기 의외로 종교적인 것에서 모티브를 딴 작품이 많아요.

07. <지옥은 신의 부재_Hell Is the Absence of God> 2001.
종교에서 기복적인 성격을 모두 제거하면 어떻게 될까요. 테드 창은 구약의 욥기- 가혹한 시련을 받은 욥이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았고, 그래서 결국 복을 받게 되었다는 이 이야기에서, ‘진정한 신앙’의 이야기라면 욥은 가혹한 시련 중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았다, 에서 결말이 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고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빼앗겨도 무슨 일이 있어도 버림받아도 변하지 않는, 절대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하지만 영원한 사랑. 그런 순결하고 앙상하고 무자비한 신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불기둥과 광풍을 동반하여 천사가 출현하고, 가끔 땅이 투명해져 지옥이 보이며, 사람이 죽을 때 천국에 가는지 천국에 받아들여지지 못하는지 알 수 있는 땅과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도 재밌었어요.

비슷한 주제로 [벌레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는데(밀양은 아직 안 봤습니다;) 벌레이야기가 인간과 용서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 작품은 신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까요. 그 ‘사랑’이란 것이,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요. 혹은 믿음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믿음과 사랑은 다른 거라고도 하는데 전 좀 어렵더군요.

08.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 다큐멘터리_Liking What You See : A Documentary> 2002.
뇌에는 특히 사람 얼굴을 인식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네요. 이 부분에 이상이 생기면 사람을 구분하기 어려워진다고요. 아마도 이 부분에서 사람의 미추를 판별할테니- 그 미추를 판별하는 기능에 인위적으로 제약을 할 수 있으면 어떨까, 사람을 생긴 것으로 구분하지 않지 않을까, 하는 사고실험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한 소설이에요. ‘외모 지상주의’란 사회적으로 형성된 부분이 더 크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사고 실험 참 재밌군요.
모종의 투표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끝까지 궁금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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